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도 갈티에리 (문단 편집) === 포클랜드 전쟁과 패배 === [[파일:external/viceland-assets-cdn.vice.com/20080612klphishar_27_ies_sco.jpg]] ~~포클랜드~~말비나스 '수복' 직후, 군중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갈티에리. 그러던 중 갈티에리는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지 불과 6개월 만에 군사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높일 목적으로 아르헨티나 연안에서 563㎞ 떨어진 [[포클랜드 제도]](말비나스 제도)를 공격하도록 군대에 명령했는데 갈티에리는 "아르헨티나가 [[스페인]]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대서양의 이 섬을 [[영국]]으로부터 되찾아야 한다"고 주장했다고. 그리고 이것이 바로 [[포클랜드 전쟁]]의 시작이였다.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전쟁을 강행한 이유는 [[미국]] [[연방준비제도|연준]]의 고금리 정책으로 심각한 경제난이 일어났고 민심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었다. 더불어 오랫동안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납치하고, 고문하고, 살해하는 등의 이른바 [[더러운 전쟁]]을 저지르면서 국민들은 군부에 염증을 냈다. 1981년 3월에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(Roberto Eduardo Viola) 장군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상황은 더욱 나빠져서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1981년 12월 대통령직이 갈티에리에게 넘어왔던 것이다. 게다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국내에서 반군부 민주화 운동 등이 거세게 일어나자, 고유영토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포클랜드를 점령하면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불안한 국내정세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. [[파일:external/estaticos01.elmundo.es/1199970104_0.jpg]] [[해군참모총장]] 아나야 [[제독]](왼쪽 흰 [[정복(의복)|정복]])과 함께. 이에 정권의 핵심세력 중 당시 해군참모총장인 [[해군]][[중장]] 호르헤 아나야(Jorge Isaac Anaya) 제독은 나름대로 정교한 전략을 짠 뒤 갈티에리에게 보고하였다. 그는 무력 점령을 하더라도 영국 본토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 제도를 되찾기 위해 반격할 의지가 없을 것이라 주장했고, 만에 하나 영국이 반격을 해온다 하더라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수송할 병력의 숫자는 물론 전투기 등 무기의 양도 한정적일 수 밖에 없어서 실제 전장에서의 군사력은 아르헨티나가 앞설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. 그러나 아나야 제독의 논지와는 정반대로 영국의 [[마가렛 대처]] 총리는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포클랜드 제도 탈환을 지시했고, 그렇게 맞붙은 [[포클랜드 전쟁]]에서 아르헨티나는 영국군의 거센 반격과 포클랜드 제도 주민들의 아르헨티나군에 대한 비협조로 완벽하게 패배했다. 영국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수송할 병력의 숫자와 전투기 등 무기의 양이 한정적이기는 커녕 [[세인트헬레나]] 섬을 전초기지로 삼아 그 곳에 엄청난 물자를 쌓아놓고 무기와 보급의 양을 탄탄하게 했다. 이로 인해 갈티에리는 결국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. 하지만 그럼에도 갈티에리는 자국 국민들에게는 [[언론통제]]를 통해 포클랜드 전쟁에서 이겼다고 거짓말을 해대가면서 버텼지만, [[1982 FIFA 월드컵 스페인]]에 참가한 [[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]] 선수단에 의해서 패전 사실이 들통났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